<앞부분의 내용> 남파 간첩으로 체포되어 21년을 복역하고 작고한 작은할아버지의 생애를 석사 논문의 주제로 삼은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과거사를 묻는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반응을 이끌어내려 노력하는 한편, 다른 가족에게서도 작은할아버지의 행적에 관한 증언을 듣고 기록한다.


(가) 작은할아버지의 생애와 그분이 살았던 시대를 두고 석사 논문을 쓰겠다는 마음이 애초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분이 설령 남이라 해도 분단 현실에 희생양으로서 당신 생애가 관심을 끌 만했는데, 제삼자가 아닌 바로 우리[각주:1] 집안 어른이었다. 논문 부제로 붙인 ‘분단 시대 어느 사회주의자의 생애’에 합당한, 고난으로 점철된 그분 생애는 누구든 정리해 볼 만한 값어치가 있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남북 화해 물꼬가 햇볕 정책이란 이름으로 트이자 북한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해도 좋을 만큼 시대가 달라졌다. 그러자 작은할아버지는 유령의 가면을 벗고 지하에서 지상의 가족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명절이나 집안 길흉사로 가족이 모이는 날이면 그분에 대한 일화가 이제 쉬쉬하지 않고 어른들 입에 자연스럽게 오르내리게 되었다. 작년 할머니 기일 때였다. 큰댁 식구, 고모네 식구에, 우리 식구가 할아버지 댁에 모이니 어린 조카들까지 합쳐 스물에 이르렀다. 속칭 ‘1ㆍ4 후퇴’ 때 월남한 조부모 대 아래 50년 사이 후손이 그만큼 가지를 쳤던 것이다. 그날도 추모 예배 끝에 작은할아버지에 관한 일화가 어른들 입에서 오르내렸다. 「 할아버지, 이제 새 천 년 이십일 세기가 시작됐는데 올해부터 우리 집안 쪽에서라도 작은할아버지 기일을 찾아 줘야 되잖겠어요? 그날 오늘처럼 가족이 모여 추모 예배를 보면 어때요? 」 큰집 준식 형이 말을 꺼냈다. 「 지금 너 뭐랬니? 대학 때 속깨나 썩이더니 아직도 삐딱한 생각을 청산 못했군. 뭐라구, 작은아버지 제사? 말이나 되는 소리니? 그 양반 제사를 우리가 왜 지내? 그 양반이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는데. 아버지도 그럴 맘 없겠지만, 난 반대야. 무슨 낯짝 있다구 우리 집 제삿밥 얻어먹어? 그 양반 망령인들 기독교식 제삿밥 먹으려 들갔어? 」 술이 거나해진 큰아버지가 당신 맏아들인 준식 형을 삿대질하며 꾸짖었다.


(나) 1950년 12월 초순이었다. 제비 떼같이 창공에 뜬 폭격기 편대가 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엄청난 양의 폭탄을 퍼붓고 있었다. 폭탄이 떨어지는 지점마다 불티가 하늘로 치솟았다. 종전 전 일본 땅에다 그랬듯 미제가 원자 폭탄을 투하할 거란 소문이 거짓말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봄이 와도 저 땅엔 풀인들 싹을 틔우겠냐 싶었다. [각주:2]는 고향 땅에 남겨 둔 부모님과 처자식 걱정이 태산 같았다. 전쟁이 나도 나는 인민군에 소집 되지 않았고, 개천역 저탄장 작업소에서 일했는데, 일제 때 유경험자라 개천광산 석탄 채굴 노동자로 작업터를 바꾸었다. 열 댓 살짜리까지 전선으로 빠지고 40대 장정이 대부분을 차지한 광산 노동자들은 전쟁 와중에도 전선에서 쓸 석탄 채굴에 여념이 없었다. 전황이 기울어 평양을 남쪽에 내줬다는 소식이 광산까지 전해지기가 10월 초, 탄광이 폐쇄되어 읍내 집으로 돌아오자 아니나 다를까, 뒤이어 국군과 연합군이 읍내를 점령했다. 뒤따라 들어온 치안대, 한청(대한청년단), 청방(청년방 위대)이 좌익 분자 색출에 혈안이 되어 꼬투리가 잡혔다 하면 하루를 못 넘겨 처형되거나 제 묻힐 구덩이 제가 파서 생매장 당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한순간에 사라지던 험한 시절이라 청년노동자동맹 분소 부부장이었던 나로서는 우선 살아남자면 우익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 할 처지였다. 중공군 참전 소식이 들리고 마침 개천읍에 주둔해 있던 국군 부대 병기창이 철수를 서두르며 노무자를 징발하기에 나는 거기에 자원했다.[각주:3] 부대로 찾아온 어머니가 내게, 너들 식구만이라도 남으로 내려가 몸을 피하라고 아내에게 이르겠다 했는데, 아내와 젖먹이 딸린 자식 넷이 읍내에 남아 있는지 피난길에 나섰는지 알 수 없었다.[각주:4] 「 너들 식구는 피난 나서더래두, 우리 양주야 살 만큼 산 목숨 아닌가. 그러니 배가 앞산만 한 광수 아내와 우리 양주는 여기 남을래. 광수가 살아서 집 찾아 돌아올 날까지 대장간을 지켜야지. 」 하던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줄곧 귓바퀴에서 맴돌았다. 나는 개털모자를 눌러썼는데 트럭이 속력을 내자 몰아치는 눈바람에 안면이 내 살 같지 않았고 무명으로 감싼 발톱은 집게로 뽑듯 아렸다. 그해 겨울, 결국 발가락 두 개가 동상으로 떨어져 나갔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시절이었다. 늙고 할 일 없으니 자나깨나 그 시절 생각이다. 손자 녀석까지 남의 심사를 박박 긁으니 초조함과 불안이 온몸을 옥죄어 온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붙이고 일렁이는 불꽃을 본다. 「 여보, 봉창 밖이 왜 저렇게 환해요? 불이 난 게 아니에요? 」 갑자기 죽은 아내 목소리가 들린다. 중손골로 찾아온 맏이 녀석과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난 뒤 화가 가라앉지 않아 곽가 불러 술이나 한잔 하려 아내에게 술상을 차리라고 말한 뒤라, 나는 깜짝 놀라 뒷봉창을 보았다. 봉창이 훤했다. 나는 방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변소 뒤 군용 천막으로 덮어 둔 폐지더미에서 불길이 일고 있었다. 덩이덩이 쌓아 둔 폐 지더미가 바람을 타고 불길에 휩싸였다. 「 여보, 어떡해요. 작은서방님이……. 」 뒤쫓아 나온 아내가 울먹였다. 폐지는 다 타 버리더라도 광수부터 살려야 했다. 나는 정신없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기침이 쏟아지고 갑자기 숨길이 가쁘다. 더 앉아 배겨 낼 수가 없다. 나는 의자에서 기우뚱 일어선다. 옷걸이에 걸린 10년 넘게 입어온 점퍼를 걸친다. 할아버지, 어디 가시게요? 하며 손자 녀석이 며늘애와 함께 빵을 먹다 돌아본다. 나는 대답 없이 현관으로 가서 테두리에 인조털 달린 겨울용 검정 고무신을 신는다.[각주:5]


(다) 불길에 뛰어든 아버지가 연기에 질식해 까무러친 작은아버지를 업구 수지면 소재 민간 병원으로 십 리 길을 뛰었지. (질문 : 병원에 입원한다면 작은할아버지 신분이 밝혀질 텐데, 할아버지가 거기에 대한 대비책은 있었는지요? 하고 [각주:6]가 물었다.)[각주:7] 아버지 생각으론 작은아버지를 우선 살려 놓구 봐야겠다는 마음부터 앞섰겠지. 화급한 마음에, 의사가 만약 신원을 대라면 폐지 집하장에서 일하는 일꾼이라고 둘러대려 했거나 말이야. 졸도했던 작은아버지는 하루 만에 깨어났으나 숨길만 붙었을 뿐 호스로 음식물을 공급해야 할 만큼 목구멍이 화기로 상했구 얼굴과 손발은 온통 붕대에 감겨 있었으니 병원에서 쉬 빼낼 수가 있어야지. 이튿날, 소방관과 경찰이 들이닥쳐 화재 원인을 캐구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파악하던 중 일꾼 하나가, 주인어른이 불더미에서 사람을 구해 내서 업구 갔다는 말을 흘려, 작은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한 사실이 들통난 거지. 그제야 아버지가 아뿔싸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어. 작은아버지의 위조된 도민증이 들통난 거야. 박 정권이 들어선 초기라 당시 시국이 얼마나 살벌했는지 알아? 전국 깡패 소탕령이 내려져 잡아들이는 족족 국토 개발 사업장에 보내구, 호구 조사가 철저했으니……. 수원경찰서에서 정보부로 옮겨 가며 신문받을 동안 아버지두 고문을 혹독히 당하셨나 봐.[각주:8]


― 김원일, 「손풍금」



34. 다음은 윗글의 ‘손자’가 논문 작성 과정에서 조사한 내용이다. 적절하지 않은 것은?

할아버지의 고향은 북한의 평안남도 개천군 개천읍이다. ① 할아버지께서는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인민군에 소집되지 않고 광산에서 석탄을 채굴하셨다. 전황이 남측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② 읍내가 국군과 연합군에 점령되었다. 중공군의 참전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는 ③ 철수를 결정한 국군 부대 병기창의 노무자 징발에 자원하셨고, ④ 부모님과 처자식이 피난길을 떠나는 것을 보고서 국군 트럭에 오르셨다고 한다.[각주:9] ⑤ 월남 후 폐지 집하장을 운영하시다가, 작은할아버지를 숨겨 준 일로 고초를 겪으셨다.



35. 

<보기> 이 작품에서는 장별로 서술자가 교차[각주:10]되고 다양한 인물의 진술이 증언 기록의 방식으로 제시됨으로써 ‘과거의 기억에 대한 다중 진술’이 구현되고 있다. 서술자 혹은 인물의 질문과 탐색[각주:11], 침묵과 진술[각주:12]을 통해 과거에 대한 정보가 등장인물이나 작품 외부의 독자에게 전달되고 축적되는 과정에서 가족의 과거사가 드러난다. (가)와 (다)의 서술자인 손자, (나)의 서술자인 할아버지, (다)에 기록된 증언의 제공자인 아버지를 각각 ㉮, ㉯, ㉰라고 할 때, 윗글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38. ‘불꽃’의 서술상 기능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④ 회상을 시작하게 하는 매개체[각주:13]




organ (Photo by Deleece Cook on Unsplash)




  1. 서술자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 즉, '나'가 있는 1인칭 시점인데 배경이 현재이므로 '손자'이다. [본문으로]
  2. (가)와 같이 '나'가 등장하지만 1950년, 즉 전쟁 당시이다. 이는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고, 따라서 서술자는 '할아버지'이다. [본문으로]
  3. 등장 인물의 살 궁리 탐색. [본문으로]
  4. 34번의 ④번 선택지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는 증거. [본문으로]
  5. 35번. <보기>의 '침묵'. [본문으로]
  6. 서술자. 누군가에게서 그 아버지, 즉 서술자의 할아버지에 대해 듣고 있다. 따라서 서술자는 '손자'이다. [본문으로]
  7. 35번의 <보기> 중 '서술자의 질문과 탐색' [본문으로]
  8. (다) 전체가 35번의 <보기>에 있는 '진술'임. 왜냐하면 '나'에게 '할아버지'(글 속에서는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본문으로]
  9. (나)에 표시되어 있음. [본문으로]
  10. 지문에 표시하였음. [본문으로]
  11. 지문에 표시하였음. [본문으로]
  12. 지문에 표시하였음. [본문으로]
  13. 불꽃을 계기로 죽은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고, 관련된 사건이 떠올랐다. (다)에 노란색으로 표시하였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