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A] 황매 시절 떠난 이별 만학단풍 늦었으니 

상사일념 무한사는 저도 나를 그리려니 

굳은 언약 깊은 정을 낸들 어이 잊었을까 

인간의 일이 많고 조물이 시기런지 

삼하삼추 지나가고 낙목한천 또 되었네

운산이 멀었으니 소식인들 쉬울손가 

대인난* 긴 한숨의 눈물은 몇 때런고 

흉중*의 불이 나니 구회간장 다 타 간다 

인간의 물로 못 끄는 불이라 없건마는 

㉠ 내 가슴 태우는 불은 물로도 어이 못 끄는고

[B] 자네 사정 내가 알고 내 사정 자네 아니 

㉡ 세우사창 저문 날과 소소상풍 송안성*의

상사몽 놀라 깨여 맥맥히 생각하니 

방춘화류 좋은 시절 강루사찰 경개* 좇아 

일부일 월부월*의 운우지락 협흡* 할 제 

청산녹수 증인 두고 차생백년 서로 맹세 

못 보아도 병이 되고 더디 와도 성화로세 

오는 글발 가는 사연 자자획획 다정터니 

엇지타 한 별리가 역여조기* 어려워라 

― 이세보, 「상사별곡」


* 대인난 : 약속한 시간에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안타까움과 괴로움. 

* 흉중 : 마음속.

* 송안성 : 기러기 울음소리.

* 경개 : 경치.

* 일부일 월부월 : 날마다 달마다.

* 협흡 : 화목하게 사귐.

* 역여조기 : 그리는 정이 간절함.


(나)

한라산이 시력 범위 안에 들어와 서기는 실상 추자도에서도 훨석 이전이었겠는데 새벽에 추자도를 지내 놓고 한숨 실컷 자고 나서도 날이 새인 후에야 ㉢ 해면 우에 덩그렇게 선연히 허우대도 끔직이도 크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까! 눈물이 절로 솟도록 반갑지 않으오리까. 한눈에 정이 들어 즉시 몸을 맡기도록 믿음직스러운 가슴과 팔을 벌리는 산이외다. 동방화촉에 초야를 새우올 제 바로 모신 님이 수줍고 부끄럽고 아직 설어 겨울 뿐일러니 그 님의 그 얼굴 그 모습이사 동창이 아 주 희자 솟는 해를 품은 듯 와락 사랑홉게 뵈입는 신부와 같이 나는 이날 아침에 평생 그리던 산을 바로 모시었습니다. 이 즈음 슬프지도 않은 그늘이 마음에 나려앉아 좀처럼 눈물을 흘린 일이 없었기에 인제는 나의 심정의 표피가 호두 껍질같이 오롯이 굳어지고 말았는가 하고 남저지* 청춘을 아주 단념하였던 것이 제주도 어구 가까이 온 이날 이른 아침에 불현듯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오리까. 동행인 영랑과 현구도 푸른 언덕까지 헤엄쳐 오르려는 물새처럼이나 설레고 푸덕거리는 것이요 좋아라 그러는 것이겠지마는 갑판 위로 뛰어 돌아다니며 소년처럼 희살대는 것이요, 빽빽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장엄하고도 너그럽고 초연하고도 다정한 것이며 준열하고도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오리까. 우리의 모륙 (母陸)이 이다지도 절승*한 도선(徒船)을 달고 엄연히 대륙에 기항*하였던 것을 새삼스럽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해면에는 아직도 야색(夜色)이 개이지는 않았는지 물결이 개운한 아침 얼굴을 보이지 않았건만 ㉤ 한라산 이마는 아름풋한 자줏빛이며 엷은 보랏빛으로 물들은 것이 더욱 거룩해 보이지 않습니까. 필연코 바다 저쪽의 아침 해를 미리 맞음인가 하였으니 허리에 밤 잔 구름을 두르고도 그리고도 그 우에 다시 헌출히 솟아오릅니다. 배가 제주 성내 앞 축항 안으로 들어가자 큼직한 목선이 선부들을 데불고 마중을 나온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소나기 한줄금을 맞으며 우리는 목선에로 옮겨 타고 성내로 상륙하였습니다. 흙은 검고 돌은 얽었는데 돌이 흙보다 더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러고도 사람의 자색은 희고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소나기 한줄금은 금시에 개이고 멀리도 밤을 새워 와서 맞은 햇살이 해협 일면에 부챗살 펴듯 하였습니다.


― 정지용, 「다도해기 5 – 일편낙토」


* 남저지 : 나머지.

* 절승 : 아주 뛰어나게 좋은 경치.

* 기항 : 항해중인 배가 목적지가 아닌 항구에 잠시 들르는 것.



42. (가)와 (나)의 공통점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운명을 수용하는 순응적 자세[각주:1]가 확인된다.

③ 내용 전개 과정에서 시간의 흐름[각주:2]이 포착된다.

인간과 자연의 대비[각주:3]를 통해 주제 의식이 표출된다. 

⑤ 상실의 경험을 극복하려는 의지적 자세[각주:4]가 나타난다.



43. ㉠ ~ ㉤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 : 구체적 현상[각주:5]에 빗대어 애절한 마음[각주:6]을 형상화하고 있다. 

② ㉡ : 자연물을 활용[각주:7]하여 애상적 분위기[각주:8]를 자아내고 있다.

③ ㉢ : 영탄적 표현[각주:9]을 통해 대상을 접한 감동을 드러내고 있다. 

④ ㉣ : 대상[각주:10]동적인 속성[각주:11]을 부여하여 외양의 다채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⑤ ㉤ : 색채어를 사용[각주:12]하여 대상[각주:13]이 주는 인상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44. 

<보기> (가)는 두 명의 화자가 각자 자신의 사연을 차례로 말하는 것[각주:14]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A]와 [B]로 구분된다.


"임이여, 언제 오십니까.." (Photo by Joshua Rawson-Harris on Unsplash)



  1. 주어진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고 한탄이나 탄식, 슬픔의 정조만 보이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본문으로]
  2. 지문에 노란 바탕색으로 된 부분에서 확인됩니다. [본문으로]
  3. 이것이 있다면, 보통 자연은 평화로운데, 인간 세상은 번잡하다는 식으로 대비됩니다. [본문으로]
  4. 주어진 상황을 바꾸려는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다만, 순응적이지 않다고 해서 의지적인 것은 아니니, 따로 보아주기 바랍니다. [본문으로]
  5. 불을 물로 끄는 것. [본문으로]
  6. '임'에 대한 그리움. [본문으로]
  7. 날이 저문 저녁 무렵 들리는 기러기 울음 소리. [본문으로]
  8. "상사몽 놀라 깨여 맥맥히 생각하니" ➔ 그리움. [본문으로]
  9. "아닙니까!" [본문으로]
  10. 산. [본문으로]
  11. 움직임이 느껴져야 하는데, 장엄하고 너그럽고 초연하고 다정하고 준열하고 아름답다는 표현에서는 느껴지지 않네요. [본문으로]
  12. "자줏빛', '보랏빛' [본문으로]
  13. 한라산. [본문으로]
  14. "자네 사정 내가 알고 내 사정 자네 아니"가 이에 대한 표지네요!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