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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메이드 인생'(1934)를 마인드맵으로 정리한 것.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줄거리[각주:1]

 

"뭐 어디 빈자리가 있어야지."

 

K 사장은 안락 의자에 파묻힌 몸을 뒤로 벌떡 젖히며 하품을 하듯이 시원찮게 대답을 한다. 두 팔을 쭉 내뻗고 기지개라도 한 번 켜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 눈치다.

 

이 작품의 주인공 P는 가난한 농촌 출신으로, 한때의 향학열에 들뜬 사람들의 열기에 힘입어 어렵사리 신식공부를 했다. 개화 이후 한국 사회는 이상한 교육열이 팽배해 있었다. 너도 나도 상급학교에 진학을 했고, 그 졸업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이른 바 지식청년들의 과잉생산 사태가 벌어졌다. 그것을 이 작품에서는 레디 메이드 인생이라 본 것이다. P도 그와 같은 과잉생산된 지식인 청년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일찍 장가를 들어 시골에는 열네 살 된 아들까지 두고 있다. 그는 자신이 주장해서 아내와 이혼을 했다. 그리고 아들 창선이를 극빈자에 속하는 형의 집에 맡겨 놓고 있다. 그 아들은 학비가 없어서 보통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는다.

 

P는 자기 나름대로 직장을 구하기 위하여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다닌다. 그는 조금 안면이 있는 어떤 신문사의 K사장을 찾아간다. 그러나 거기서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간단하게 거절을 당한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없는 일자리를 구할 게 아니라 농촌으로 돌아가 뜻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엉뚱한 설교까지 듣는다. P는 그 자리에서 농촌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관념적이고 부당하다고 역설하고 나온다. 그는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서 총독부 쪽으로 걸어가면서 여러 가지 공상과 생각을 한다. 일제와 신흥 부르조아는 노동자와 농민의 교육열을 부추켜서 실질 인텔리를 양산한다는 생각도 한다. 참담한 기분이 되어 자신이 기거하는 사글세방으로 돌아온 P에게는 두 가지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주인 노파의 집세 독촉이다. 그리고 하나는 시골 형이 부친 편지이다. 그 편지에는 아들 창선이가 학교에 다니지 못할 뿐 아니라 끼니도 이을 길이 없어 그 애처러움을 견디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는 어떻게 차비가 마련되면 애비인 P에게 올려 보내겠다고 쓰여 있는 것이다. 잔뜩 심사가 착잡해 있는 P의 거처로 M과 H가 찾아온다. M은 법률을 전공해서 육법전서를 줄줄 외는 친구다. 그리고 H는 경제학을 전공한 지식청년이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빈털털이인 식민지의 지식청년 룸펜이다. 셋은 M의 법률 서적을 잡혀서 돈 6원을 손에 쥐고는 싸구려 술집을 순례하면서 실컷 술을 마신다.

 

이런 생활을 하는 P에게 시골에서 한 장의 편지가 날아든다. 아들 창선이를 인편에 올려보낸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 저기 다니면서 돈 15원을 마련한다. 그리고는 풍로니 남비니 양재기 숟가락 등을 사서 아들과 자취할 채비를 차린다. 그리고는 어느 인쇄소의 문선과장을 찾아가서는 심부름꾼으로 아들을 써 달라고 부탁한다. 이튿날 아침 일찍 창선이를 데리고 XX 인쇄소에 가서 A에게 맡기고 안 내키는 발길을 돌이켜 나오는 P는 혼자 중얼거렸다.

 

"레디메이드 인생이 비로소 겨우 임자를 만나 팔리었구나." (1934)

 

 

 

작품 해설1[각주:2]

 

1934년 5월부터 7월까지 『신동아』에 발표되었던 채만식의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이란 만들어 놓고도 팔리지 않는, 그러니까 임자 없는 기성품 인생이란 뜻이다. 이미 운명은 만들어졌으나, 그 운명이 어디로 팔릴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식의, 이런 결정론 반, 비관적 세계인식 반의 상태에 이 시기 작가가 놓여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동반자 작가로서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에 입각, 현실을 바라보는 자세에는 변동이 없으나, 그 세계관이 지시하는 역사의 방향타 쪽에 전적으로 몸을 싣지는 못했던, 동반자적 지식인의 내면풍경이 이 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 당시 지식인의 실업 문제가 심각했던 것은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작가 자신 실업의 상태에 자주 놓여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작품이 순전히 관념적 몽상으로 쓰여진 작품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는 도저한 자기풍자와 함께 자기연민의 시선이 공존하고 있는데, 이후 「탁류」(1937~1938)와 「태평천하」(1938)로 나아가기 전 단계의 채만식다운 창작방법의 불안한 통합 상태가 여기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채만식 문학의 한 출발점으로서 중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적인 경제공황의 파급 속에서 극심한 고등 실업상태에 놓여 있었던 ‘P’라는 지식인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다. 비굴하게 취직 부탁을 하러 갔다가 곧바로 쫓겨나는 삽화적 장면이 먼저 묘사된 후, 지식인 실업의 사회구조적‧역사적 원인분석이 논설의 형태로 장황하게 제시된다. 구직에 실패한 ‘P’는 자신의 장서와 양복까지 잡혀 구한 돈을 난봉질에 할애하는데, 작가는 이와 같이 지식인의 퇴폐적 행태를 묘사함으로써 그들이 갖는 삶에의 의욕을 자기기만적인 형태로나마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롭고 압권인 대목은 이처럼 자기 비하감과 모멸감에 빠진 ‘P’가 마침내 아무런 말없이 자신의 아들 창선을 일찍이 인쇄소 직공으로 팔아 넘기는 결말 부분이라 하겠다. 그러고는 “‘레디메이드’ 인생이 비로소 겨우 임자를 만나 팔리었구나” 라고 내뱉고 마는데, 이는 식민지 지식인의 비애를 알린 우리 근대문학사상 한 명편의 언어라 할 것이다. 이처럼 당대적 인식의 지평 안에서 도도한 자기풍자의 언술을 토해 낸 채만식 문학의 선각은 최재서가 「풍자문학론」(1935)을 입안하게 되는, 자기풍자 미학의 한 모델 형상을 제시한 것이라 할 만하다.

 

 

 

작품해설2[각주:3]

 

‘레디메이드’란 무슨 뜻인가. ‘기성품’이란 뜻이다. 이미 만들어진 인생이라는 것, 이 작품은 그 제목에서 이미 그 주제 의식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인생이 기성품 인생이라는 말인가. 

  

작중 주인공 P는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 실업자이다. 더구나 아내와 이혼을 한 그는 자신의 아들을 시골 형님집에 맡겨 둔 상태이다. 어느 신문사에 찾아가 일자리를 부탁해 보지만, 사장은 오히려 농촌에 가서 문맹 퇴치운동을 해 보라고 권유한다. 셋방 주인은 P에게 방세를 채근하고, 시골 형님은 아들을 데려가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P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M, H와 더불어 세태를 한탄하다가 술을 마시고 유곽으로 놀러 간다. P는 어린 작부에게 자신이 가진 돈을 몽땅 털어 주고 도망치듯이 나온다. P는 다음 날 올라온 아들의 일자리를 어느 인쇄소 사장에게 부탁한다. 아들이 일하게 된 인쇄소에서 발길을 돌리는 P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린다. “레디메이드 인생이 비로소 겨우 임자를 만나 팔리었구나.”

  

작품의 결말을 보면 작품 제목이 가리키는 것이 P의 아들과 같은 밑바닥 계층 사람들의 이미 결정된 인생행로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기성품 인생은 오히려 P 자신과 같은 고등실업자들의 운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P나 M, H와 같은 고등실업자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교육 정책에 대해 이 작품은 아주 분석적이고도 역사적인 설명과 비판을 상세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는 식민지 근대 초기의 ‘교육만능론’의 무대책과 무책임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독자들은 춘원 이광수의 「무정」(1917)에서 작중 주인공 이형식이 설파한 ‘교육만능주의’를 떠올려 보면 좋을 것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 발표되기 직전에 이광수는 「흙」(〈동아일보〉, 1932. 4.12?1933.7.10)이란 작품에서 그렇게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농촌에서 열심히 계몽운동을 벌이는 모습을 제시하기도 했다.

 

바로 이 작품에서 주인공 P가 신문사 사장의 ‘농촌계몽운동론’을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흙」의 허숭의 모습이 허구적인 것임을 폭로하는 것과 다름없다. 농촌의 문맹퇴치운동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 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들은 무얼 먹고 사느냐는 P의 항변만큼 농촌계몽운동의 기만성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는 것도 없을 것이다. P는 또 “농민이 우매하다든지 문화가 뒤떨어졌다든지 또 생활이 비참한 것이 근본 원인이 기억 니은을 모른다든가 생활 개선을 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작가가 이런 발언들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은, 1926년에서 1929년에 걸친 작가 자신의 실직과 고향에서의 농촌 생활 경험이 생생하게 밑받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이 작품에서는 P와 같은 이들이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뛰어들기에도 “주관적 정세가 너무도 미약”하다고 비관한다.

 

사회주의 계열의 작가인 이기영이 「고향」(조선일보, 1933.11.15~1934.9.21)이라는 작품에서 작중 지식인 주인공인 김희준이 결국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를 통해 혁명의 전망을 열어 내고자 한 것과 비교해 보아도 이 작품의 관점은 큰 차이가 있다. 이는 단지 작가의 기질적 특징에 기인했다기보다 부정적 또는 비관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했던 채만식의 냉정한 태도에 기인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유곽에 팔려간 어린 소녀가 성을 상품으로 팔아 밥을 먹는 현실, 정조 관념이 단지 허구적인 윤리 도덕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 보이는 것 또한 그와 같은 작가 정신에 의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이와 같이 식민지 고등교육 정책의 본질적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당대 조선의 지식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허위의식과 속물근성 또한 여지없이 자기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P가 방세도 못 내고 배는 곯으면서도 담뱃가게 주인에게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 싸구려 담배인 마코가 아니라 고급 담배인 해태를 사 피울 때의 행동과 내면 심리를 작가는 세밀하게 묘사한다. 이처럼 객관적인 현실에 대한 공격적 풍자뿐만 아니라 작중 주인공 자신의 냉정한 자기 풍자 또한 공정하게 수행하는 데에 풍자 작가 채만식의 진면모가 있다. 《문장》

 

인텔리…… 인텔리 중에도 아무런 손끝의 기술이 없이 대학이나 전문학교의 졸업 증서 한 장을 또는 조그마한 보통 상식을 가진 직업 없는 인텔리…… 해마다 천여 명씩 늘어가는 인텔리…… 뱀을 본 것은 이들 인텔리다.

부르주아지의 모든 기관이 포화 상태가 되어 이 수요가 아니 되니 그들은 결국 꾐을 받아 나무에 올라갔다가 흔들리는 셈이다. 개밥의 도토리다.

인텔리가 아니 되었으면 차라리 노동자가 되었을 것인데 인텔리인지라 그 속에는 들어갔다가도 도로 달아나오는 것이 99퍼센트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깨가 축 처진 무직 인텔리요. 무기력한 문화 예비군 속에서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 없는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

 

채만식, <레디메이드 인생>

 

 

― 2011. 2. 4. 국포유에 작성한 글

 

  1. 참고, 우리말사랑누리집 + 일교시닷컴 [본문으로]
  2. 출처, 한국현대문학대사전(권영민) [본문으로]
  3. 출처, 문장(문학박사 정홍섭)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