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숙도에 부는 바람의 노래(http://blog.daum.net/kcs1279/74)
'모래톱이야기'(1966)의 마인드맵 정리.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건 오랫동안 교원노릇을 하며 알게 된 한 소년과 그의 젊은 홀어머니, 할아버지, 그들이 살아오던 낙동강 하류의 어떤 외진 모래톱-이들에 관한 그 기막힌 사연들조차, 아득한 옛날 이야기처럼 세상에서 버려져 있는데 대해서까지는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건우란 소년은 내가 직접 K중학에서 담임하던 제자다. 비가 억수로 내리던 날 지각을 한 건우에게 늦은 이유를 묻자 나룻배 통학생이라며 무엇인가를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 나는 건우 아버지가 안 계신다는 걸 안 뒤로 은근히 동정이 가게 되었다. 그것은 건우가 써온 '섬얘기'라는 글을 읽고부터였다. 평화로운 자기고장 -갖은 풍파와 홍수를 겪어 오는 동안 모래가 밀려서 된 나라 땅인데 유력자가 통째로 삼키려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년의 날카롭고 냉랭한 심사가 글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나는 가정방문 주간에 건우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 33세 농업, 할아버지 62세 어업, 삼촌 32세 선원, 재산 정도 하(下), 건우의 행복하지 못할 가정 환경에 건우에게 많은 걸 묻진 않았다. 건우네 집은 조마이섬 위쪽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건우의 홀어머니의 손길이 곳곳에 미쳐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였다. 건우 어머니는 나를 보자 시골 색시다운 숫기를 내비치며 수인사를 건넸다. 시아버님이 고깃배를 타고 보리 농사와 채소로 그럭저럭 살아간다는 얘기를 하였다.
나는 건우의 공부방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그중 '섬얘기'라는 책 한 권이 특별히 눈에 들어왔다. 건우에게 가져오라고 시키니깐 건우는 부끄러운 내색을 띄우며 책을 건넸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순수한 섬사람들을 데려가 투표 용지에 도장을 찍게 하고 정치의 영향이라곤 받아 보지도 못하는 섬사람들, 헐벗고 배우지 못한 그들의 아들이 먼저 훈련을 받고 총을 메고 군인이 되어 갔다는 것, 나는 건우의 손을 꽉 쥐었다.
건우의 집을 나서 나루터로 되돌아오는 길에 육이오 때 함께 감옥살이를 했던 일명 '송아지 뺄갱이'인 윤춘삼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옆에는 건우의 외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갈밭새 영감인 건우 할아버지는 우악스럽게 생겼다. 그들에게 이끌려 술집에 들어섰다. 술을 마시며 갈밭새 영감은 건우의 '섬얘기'에 나온 것처럼 기막힌 일화를 말해주며 처음부터 개탄조로 나왔다. "우리 조마이섬 사람들은 지 땅이 없는 사람들이오. 와 처음부터 없기싸 없겠소마는 죄다 뺏기고 말았지요. 옛적부터 이 고장 사람들이 젖줄같이 믿어 오는 낙동강 물이 맨들어 준 우리 조마이섬은 ―."
역사까지 들먹이며 눈에는 증오의 빛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윤춘삼도 한 몫 거들었다. 갈밭새 영감이 문둥이들을 쫓아내었던 일이 있었다며 억지로 영감의 왼쪽 팔을 걷어 붙여 커다란 흉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건우네 집을 다녀온 뒤 두어 달이 지났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건우가 수박을 드시러 꼭 오라고 하기에 좁다란 어깨를 툭 쳐주며 한번 가겠노라고 돌려보냈다. 그런데 공교히도 그 처섯날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사흘째부터는 강풍까지 겹쳐 온통 폭풍우로 바뀌고 말았다. 이때쯤 되면 남의 불행쯤은 구경 삼아 보아 넘기는 게 도회지 사람들의 버릇이다. 나는 건우네 집이 있는 조마이섬 일대가 홍수에 잠겨가고 있지나 않나 걱정이 되었다. 이때 구포가는 버스를 잡아탔다. 구포 다릿목에서 내렸으나 물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 다리는 통금이 돼 있었다. 거기서 윤춘삼을 뜻밖에 만나게 되었다. 그는 덥석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갈밭새 영감이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것이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자 둑이 터져서 온 섬이 떼죽음 당할 뻔한걸 건우 할아버지가 설두를 해서 미리 무너뜨리고 있는데 깡패 두명이 오더니 훼방을 놓고 시비를 걸었다는 것이다. 영감이 조용히 사정을 말해도 소용없었고 오히려 영감의 괭이를 뺏어 물 속에 던져버렸다고 했다. 그러자 영감도 화가 난 나머지 그자를 물 속에 태질을 해 버렸던 것이다. 그자는 탁류에 휘말려가고 달아난 자가 고자질하자 경찰이 와 잡아갔다는 윤춘삼의 말이었다.
폭풍우는 끝났다. 신문들도 말이 없었다. 섬사람들의 애절한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육십이 넘은 갈밭새 영감은 결국 기약 없는 감옥살이로 넘어갔다. 그리고 9월 새학기가 되어도 건우군은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일기장에는 어떠한 글이 적힐지 황폐한 모래톱 - 조마이섬을 군대가 정지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1966년)
“이십 년이 넘도록 내처 꺾어 오던 내가 새삼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건…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서두처럼「모래톱 이야기」는 김정한이 20여 년의 침묵을 깨고 문단에 복귀한 소설이다. 4.19혁명으로 기성 문단을 혁신하려는 새로운 문학운동이 싹트려고 하던 때,「모래톱 이야기」(1966)는 지식인과 민중의 만남, 민중 현실의 발견을 형상화함으로써 한국전쟁 이후 맥이 끊겼던 진보적 민중문학의 재기를 예고하였다.
김정한이 식민지 시절에 「사하촌」과 같은 작품으로 지배 권력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며 민중의 고통을 치밀한 필치로 그려냈던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가 「모래톱 이야기」에서는 낙동강 하류의 외진 모래톱에 사는 사람들의 사연을 통해 우리 민족의 비극적 역사와 그것이 초래한 민중의 고달픈 삶을 전해준다.
‘나’가 담임을 맡은 반에는 비만 오면 지각하는 학생 건우가 있는데, 그 애는 낙동강 하류 김해 땅에서 나룻배를 타고 부산으로 통학을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나’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품을 파는 어머니와 고깃배 타는 할아버지와 함께 근근이 살아가는 건우의 집으로 가정방문을 나간다. 건우네의 생활 수준은 과연 가난했지만, 살림살이에는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묻어났으며 청결했고, 건우 어머니의 모습에서는 고생을 무릅쓰고 아들을 멀리 일류 중학에 보내는 의지와 정열이 엿보였다.
그 날 ‘나’는 우연히 건우의 조부 갈밭새 영감, 그리고 육이오 때 송아지를 군대에 뺏기고 항의했다가 잡혀서 ‘송아지 뺄갱이’라 불리는 윤춘삼 씨와 같이 술 한잔을 하면서 조마이섬에 얽힌 역사적 일화를 듣는다. 그것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땅이 을사보호조약 때 일본 동양척식회사 명의로 둔갑을 하였으며, 해방이 된 뒤에는 어느 국회의원 땅이 되었다가 지금은 매립 허가를 얻은 유력자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땅을 가로채이고 원한을 품은 사정을 들은 ‘나’는 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가라고 건우를 격려한다.
그러던 여름날 태풍을 동반한 집중호우가 쏟아져 낙동강 지대는 홍수 난리를 겪는다. 걱정이 된 ‘나’는 건우네를 찾아가는데 이미 그 일대 마을은 물길에 휩쓸려 처참한 몰골로 변해 있었다. 건우네는 다행히도 피신은 하였으나, 갈밭새 영감이 홍수를 막으려고 미리 둑을 허물어뜨린 일로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제까지 그는 조마이섬을 지키기 위해 고투를 마다하지 않고 싸워왔던 것인데, 권력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사람의 목숨보다 유력자의 이익을 우선하느라 그를 살인죄로 몰아 끌고 가버린 것이었다. 섬사람들의 애절한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신문 보도는커녕 섬에는 군대가 들어와 통제하고, 그 후 건우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은 구한국시대의 역둔토(驛屯土)가 일제의 동양척식회사의 토지로 넘어가서 어느 일본인의 토지가 되고 해방 후에는 어느 유력자의 손에 넘어가기까지, 조마이섬의 토지 소유의 역사를 통해 해방 이전과 해방 이후에 걸쳐 여전히 계속되는 민중의 고통을 증언하고 있다. 일본인에서 국회의원, 유력자, 기업인 등으로 땅의 법적, 제도적 지배자가 바뀌어온 경로는 그대로 근대화의 폭력성을 증언해 준다. 근대적 삶의 척박함과 피폐함은 바로 자신의 땅에서 유리된 민중의 고달픈 운명으로 대변된다. 민중은 일상적인 생활 공간을 폭력을 동반한 지배 권력에 의해 박탈당하는 과정을 민족적․민중적 리얼리즘의 실현을 통해 그려냈던 것이다.
이 작품 이후에도 김정한은 일제시대 사하촌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던 것과 달리, 낙동가의 섬마을이나 강마을을 배경으로 삼는다. 이것은 역사의 질곡에 의해 지배와 억압의 고통을 감수해 온 우리 민족의 공간을 민중의 낙동강으로써 구체화한 것으로, 「모래톱 이야기」는 ‘땅’이라는 제재를 통해 한국이라는 근대 사회의 현실을 실감 있게 집약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본격적인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장》
더 보기
세 컷의 그림으로 표현한 모래톱 이야기 - http://youngee.tistory.com/61
― 2011. 1. 25. 국포유에 작성한 글
'자료 > 현대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시] 국수(백석) (0) | 2019.05.07 |
---|---|
[현대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채만식) (0) | 2016.07.24 |
[현대소설] 복덕방(이태준) (0) | 2016.07.22 |
[현대소설] 과도기(한설야) (0) | 2016.07.22 |
[현대소설] 겨울의 환(김채원) (0) | 2016.07.03 |
[현대소설] 한계령(양귀자) (0) | 2016.07.03 |
[현대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박태원) (0) | 2016.07.03 |
[현대시][프레詩] 상한 영혼을 위하여(고정희) (0) | 2016.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