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강자입니까, 약자입니까?


군 복무를 마치고, 모 종합병원에 잠시 입원을 했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옆 침대에 나이가 50대 정도로 보이는 초등학교 교사 분이 계셨는데, 바로 옆이다 보니 그들의 사연을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습니다. 대강 이렇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모두 초등학교 교사인데 무슨 소송에 휘말려 억울한 일을 당했다, 그런데 그 억울함을 해결할 방법을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들은 매우 무력해 보였습니다.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저분들은 학교에서는 얼마나 강력한 권위의 상징일까? 더구나 부부교사라니, 사회적으로 얼마나 안정된 삶인가! 그런데 학교 밖에서는 영락없는 약자에 불과하구나. 이것 참 씁쓸하다."


그래서, 이 글의 첫 문장으로 던진 질문에 사실은 정확히 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위 사례처럼 언제든 소수자 또는 약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산업화가 진행되기 이전의 농촌은 다수자의 공간이었지만, 산업화 이후로 농민은 소수자로 전락했습니다. 

재벌들의 조직에서는, 우리 같은 평범한 중산층이 소수자입니다. 

부자도 망하면 거지가 될 수 있습니다. 거지/부랑자/노숙자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소수자입니다. 

장애가 없던 사람도 사고를 당하면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늙습니다. 고령화로 인해 노인이 다수가 될지라도, 사회적 목소리는 소수자만큼 작을 수 있습니다. 

한국인도 미국에 가면 소수자가 됩니다. 미국 사회에서 한국인들은 온갖 차별의 대상이 됩니다. 

정규직에겐 비정규직이 소수자입니다. 

마초적인 남성 집단에서는 여성이 소수자입니다. 여성의 권리나 인격은 남성성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추락합니다.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남성들의 카톡방 성추행이 그 단적인 사례이지요.

고등학생일 때에는 다수의 일부였다가,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생이 되면 소수자가 됩니다. 

대학생일 때에는 사회의 지식인 계층이었다가, 졸업 후에도 취업에 실패하면 소수자가 됩니다.

대학교에 다닐 때에는 청소노동자 분들이 소수자입니다. 하지만, 그분들도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 들입니다.

대다수 국민들의 관점에서 농어촌 지역의 학생들은 정보소외지역에 사는 소수자입니다. 농어촌 특별전형이라는 것도 이러한 소수자들을 위한 사회적인 배려 시스템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도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다른 어떤 소수자가 되더라도 보호받길 원한다면, 또다른 소수자들의 문제에도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따뜻하고 성숙한 사회는, 이런 소수자를 배려하는 사회입니다. 약자를 다수가 감싸 안아주어야 하는 사회입니다. 

소수자에게 배려를 하기 위해서는, 다수에게 조금의 불편함이 따를 수밖에 없어도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잘하는 것이라도 잘 못하는 사람을 위해 기다리고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아량을 갖고 싶습니다. 잘하는 것보다 잘 못하는 것들이 더 많은 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