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시.기] 가지가 담을 넘을 때(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 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 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 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 정끝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중심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단순한 상황을 제시하고 있구나. '수양' 하면 수양버들이 연상되겠지? 담을 넘을 정도로 꽤나 큰 수양인가 보다.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 어라? 수양 가지가 담을 넘어갈 정도로 크고 튼튼하게 자란 것이 수양 가지만의 일이 아니라고? 그럼, 누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로군.


얼굴 한 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 수양 가지가 뿌리를 본 적이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거야.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하는 뿌리가 있어야만 가지가 자랄 수 있겠지? (의인법. 대상에 인격을 부여.)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 꽃과 잎은 영원히 가지와 함께 하는 것들은 아니지? 하지만, 그 잠깐잠깐의 만남이 있었기에 줄기와 가지가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겠지. (의인법)


혼연일체 믿어 주지 않았다면

➔ '혼연일체' 믿는 것이 어떻게 믿는 걸까?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믿어주었다는 것이겠지? (의인법)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 뿌리, 꽃, 잎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면, 가지는 어찌 되었을까? 담을 넘을 정도로 크고 튼튼하게 자랄 수 있었을까? 못 했겠지? (의인법) 이 구절에서 이런 생각을 하면 좋겠어. ― "내가 이렇게 자랄 수 있게 된 것도 알게 모르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믿어준) 그 누군가의 덕분이구나!"라고.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 '아니었으면'이라고 했으므로, 담을 넘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일.

➔ '고집 센'이라고 했으므로, '비'는 부정적 존재. 고난, 시련.

➔ '한 닷새 내리고 내'렸다고 했으므로, 그 고난과 시련이 길었음을 알 수 있겠네.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 '아니었으면'이라고 했으므로, 과거의 일.

➔ '도리 없는'이라고 했으므로, '폭설'은 부정적 존재. 고난, 시련.

➔ '밤새'라고 했으므로, 그 고난과 시련이 길었음을 알 수 있겠네.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 담을 넘는 일이 가지에게는 매우 신명나는 일인가 보다. 즉 위의 두 행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이렇겠지. ― '고난과 시련이 없었다면 지금 담을 넘는 것이 신명나지 않았을 것이다.' ➔ '고난과 시련이 있었기에 지금 담을 넘는 것이 신명난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 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 '머뭇 세우고', '가둬 두는', '금단의'와 같은 수식어를 통해 '담' 또한 부정적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구나.

➔ 즉, '마음을 망설이게 하고, 바깥 세상을 가두는, 금지된 존재가 없었다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 금지된 존재였던 담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향해 정면돌파했구나. 큰 용기가 필요했겠지만, 크게 성장했겠지?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 담을 연 순간 수양 가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렇지, 바로 '자유'야.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 하지만 수양 가지는 해냈어.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 지금까지 수양 가지 얘기만 하다가 얘네들은 왜 갑자기 나왔을까? 얘네들은 수양 가지랑 다를까? 뿌리나 꽃, 잎 도움 없이 자랄 수 있나? 더욱이, 줄장미나 담쟁이는 담을 타고 올라가는 것들이잖아? 그래, 수양 가지와 비슷한 녀석들이야. 수양 가지는 외롭지 않겠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 '가지가 성숙하여 자신을 가두었던 한계를 뛰어넘어 자유를 얻을 때, 가지에게 한계는'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 무명에 획을 긋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름이 없는데 획을 긋는다? 그래, 이름을 얻는다는 것이야. 김춘수의 시에서 꽃은 이름이 불림으로써 존재가 되었다면, 이 시에서는 담을 넘어 자유를 얻음으로써 존재가 되었어. 이것을 '도박'이라고 한 이유는 그것이 때로는 무모해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겠지.

➔ 그런데 어때? 수양 가지에게 담이 여전히 부정적인 의미일까? 이쯤 되니 담이 있었기에 수양 가지도 성숙할 수 있었던 것이니, 마음이 훌쩍 자란 수양 가지에게 앞으로 '담'은 '동반자(도반)' 아니겠어? 참고로, 수양 가지가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뿌리, 꽃, 잎'과 같이 믿어주고 도움 준 존재도 있지만, '비, 폭설, 담'과 같은 시련도 있었음을 잊지 마.

 그래서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게 아닐까 싶어.  

1. 영화 속 그 어떤 영웅도, 혼자 잘 나서 지구를 구한 것이 아니다. 고뇌하고 힘들어할 때 알게 모르게 도와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2. 앞에 있는 시련을 시련이라 생각지 말자. 도전의 대상, 성장의 원동력으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 '사이버문학광장 - 문장'에서 제작한 동영상입니다. 시인이 직접 낭송했으며, 말미에 안도현 시인의 소감도 나오니 시의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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